[진서우의 제주 일 년 살이] 억새와 들불축제로 유명한 새별오름
[sjzine 진서우 기자] 재작년 겨울에 제주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방황하던 내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켜켜이 쌓여갔고, 틈만 나면 제주에 내려갔다. 숲과 오름을 떠돌았다. 여행은 나를 위로하고 치유했다. 결국 촌장과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촌장은 내 남편이다. 십 대 시절 글쟁이가 되고픈 친구들과 ‘시인의 마을’이라는 동인을 만들었고 그 모임의 촌장을 맡았다. 그래서 내 글 속에서 남편은 촌장으로 불린다.
제주살이 첫 번째 여행지, 새별오름의 넓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탁 트인 벌판에 홀로 솟아있는 새별오름이 거대한 모습으로 내게 왔다. 하늘 빛깔이 이럴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파랗다. 새별오름은 오름 전체가 억새로 뒤덮여 있다. 억새밭과 조릿대 군락지가 많은 제주는 겨울 풍경이 황량하지 않다. 게다가 연한 풀들이 여기저기 초록 들판을 이루고 있어 이곳에는 겨울이 없는 땅인 줄 착각하곤 한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오름이려니 생각했는데, 꽤 가파른 지형이다. 새별오름은 오름 자체의 높이가 119미터로, 야자수 매트를 깔아 안전하게 길을 내었지만 거의 직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 길을 사람들이 줄지어 올랐다. 먹이를 나르지 않는 개미들의 행렬 같다. 힘들어하는 얼굴에 웃음이 햇살처럼 번졌다. 촌장과 나는 올라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뒤돌아보면 쏟아져 내리는 파란 하늘빛 속에 억새와 내가 서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저 아래 까마득하게 주차장이 보이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조금 전 저 밑에서 오름 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참 작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입장이 바뀌었다. 밑에 있을 때는 위의 사람을 알 수 없고, 또 위에 있을 때는 아래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사는 수직의 세상 같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가쁜 숨을 골랐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제주의 바다와 산들과 들판이 하늘 아래 납작 엎드려 있다. 새별오름은 ‘초저녁에 외롭게 떠 있는 샛별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새별오름과 함께 크고 작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다. 동쪽으로 백록담이 우뚝 솟아있고, 서남쪽으로는 비양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비양도 앞에는 지난여름 우리 가족이 휴가를 보냈던, 에메랄드 물빛이 아름다운 협재해변이 있다.
왕복 30분 정도 소요되는 새별오름. 너무 짧은 만남이라 작별을 고하기가 아쉬웠다. 정상을 지나 동쪽으로 내려가면 주차장이 있던 데로 이어진다.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우리는 내려가지 않고 앞쪽에 보이는 이달봉으로 갔다. 봉우리 정상에는 현무암 돌담을 사각으로 두른 무덤이 있다. 산 밑이나 밭 중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제주의 무덤이다.
죽은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귀퉁이에 돌문을 내었다. 무덤의 주인은 높은 곳을 좋아했나 보다. 오름 꼭대기 한가운데에 묻힌 무덤의 주인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하다. 한평생 오름에서 살다가 오름에서 죽었을까? 그의 기쁨과 슬픔과 눈물도 고스란히 오름을 오르내렸을까? 그래서 죽어서도 오름을 떠나지 못한 걸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나를 쫓아왔다.
북쪽과 서쪽 사이로 내려다보면 말발굽형으로 지형이 열려있고 들판이 거침없이 내리뻗는다. 그 옛날 최영 장군이 몽골군과 격전을 치른 들판이다. 무수한 삶과 죽음이 갈렸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오래도록 그곳에 서성였을 아픔이 떠올랐다. 슬픔은 남은 자들의 몫이었고, 시간은 기어코 죽음을 풍화시켜 부드러운 능선으로 남겼다.
촌장과 나는 인적이 드문 서북쪽 방향으로 길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오솔길 중간쯤 무성한 억새밭에서 시원하게 막걸리 한 잔 나누어 마셨다. 새별오름처럼 달콤하다. 그때, 억새밭에서 노루가 뛰어나왔다. 급하게 셔터를 눌렀지만 워낙 잽싼 녀석이라 궁둥이만 찍혔다. 자식, 쩨쩨하기는. 모델이 되어주지 않는 노루에게 툴툴거리며 가볍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는 억새의 바다 위로 윤슬이 반짝거렸다. 아름다운 억새를 카메라에 담아보려고 애썼지만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들불축제가 열린다. 새별오름 전체에 불을 놓는 것이다. 들불축제는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해묵은 풀과 해충을 없애려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 목초지에 불을 놓았던 목축문화에서 왔다고 한다.
현대적 감각으로 살려낸 들불축제는 올해로 22회째를 맞이한다. 거대한 오름 전체를 활활 태워버린다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고 황홀하다. 그날 나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생을 다해 가는 억새가 마지막 아름다움을 불태우고, 그 옆에서는 풀들이 새순을 견고하게 올리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란히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도 하나는 죽어서 갈색이고 다른 하나는 강건한 초록이다. 그렇게 새별오름의 억새들은 제주의 완고한 바람 앞에서 서서히 비워져 갔다.
오름을 내려오면 서북쪽 사면에 망자들이 잠든 새별오름 공동묘지가 있다. 봉긋한 젖가슴을 닮은 오름도 무덤도 모두 평화로워 보였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무덤가를 걸으면서 소망했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순리로 다가올 죽음이라면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반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새별오름을 다섯 개의 봉우리를 따라 넓게 원을 그리듯이 돌고 돌아 2시간 만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서 낯선 공기를 한껏 마시고도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 주차장 한편에는 푸드 트럭들이 길게 늘어서서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 새별오름 여행팁]
2019년 들불 축제는 3월 7일부터 3월 10일까지 4일간 열리며, 셋째 날 오름 불놓기 행사가 진행된다. 행사에 관한 자세한 체험 행사 정보는 제주시청 홈페이지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