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속도로 떠나는 4월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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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전국 곳곳에서 봄꽃축제가 열립니다. 20주년이 넘은 꽃축제도 있고 근래 갓 생긴 꽃축제도 있지요. 요즘은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와 한국의 봄을 즐기고, 영문으로 된 한국의 봄꽃 축제 소식도 종종 접하게 되죠. 그 덕분에 봄꽃의 영문명도 알게 되었답니다.

벚꽃은 Cherry Blossom, 철쭉은 Royal Azalea, 유채는 Rape Flower, 진달래는 Korean Rosebay, 매화는 Japanese Apricot...그런데 매화를 Japanese Apricot이라 표기한 축제를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대부분 Japanese를 빼고 Apricot Flower Festival이라고 줄여서 부르던데, 실상 Apricot은 매화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살구를 가리키는 단어. 결국 영문 표기명만 보고 살구꽃을 보러간 외국인 관광객들은 매화를 만나게 되는 셈이죠.

재밌는 건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서 진달래(Korean Rosebay) 축제가 열린다는 영문기사를 본 적이 없답니다. 그들도 진달래를 우리처럼 Korean을 빼고 그냥 Rosebay라고 부르기라도 하는 걸까요? 이런! 김소월이 노래한 것처럼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데, 그 꽃들에게 이름 붙여 ‘국적’ 따지고 ‘의미’ 따지는 제 머리만 이리저리 복잡해지는군요. 봄꽃들이 소리칩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사 다 내려놓고, 지금은 남도로 내려가 봄꽃을 만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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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리산 만복대 아래 상위마을로 내려갔습니다. 3만 그루 넘는 산수유 나무가 자라는 곳, 봄비 멎어 촉촉해진 길을 지나 산수유 핀 마을로 들어갔지요. ‘영원불멸의 사랑’이 꽃말인 산수유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건 천 년 전. 중국 산동성 처녀가 구례로 시집을 오며 가져온 나무가 우리나라 산수유의 시목이 되었다지요. 산동면 계척마을에 자리한 시목은 할머니 나무라고 불리지요. 참 ‘산동’이란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답니다. 산수유 꽃망울이 터진 상위마을은 온통 노란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돌담길에도, 서시천이 흐르는 숲길에도 노란 꽃들이 햇살보다 더 환히 빛나고, 긴 겨울을 보내고 만난 봄풍경이 생경해 입을 다물었다가 꽃망울 터트리듯 감탄을 하고 맙니다. 아,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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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벚꽃을 보러가자면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빠른 길, 창원시 산업도로를 지나가는 것 보다 둘러가더라도 창원시에서 안민고개를 넘어가는 게 좋답니다. 벚꽃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길 위에 잠깐 멈춰 꽃잎 날리는 풍경 너머 내려앉은 푸른 바다를 보아야 하니까요. 마침 창원에 사는 지인이 “안민고개 넘어가는 길이 좋아요”라고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섬진강 벚꽃길만 알지, 바다 내려뵈는 안민고개 벚꽃 길은 몰랐을 겁니다. 얇고 자그마한 꽃이 봄바람에 한닙, 한닙 나뉘어 꽃비 내리듯 하염없이 떨어지는 길, 찬란한 정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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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고개를 내려와 나는 여좌천을 흘러 다니다가 돌다리 아래 가만히 앉았습니다. 햇살이 수면 위에 반짝이고, 벚꽃이 그 위에 살짝 내려앉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니 내려 보다가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어쩌면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이 허공을 날다가 지면에 닿는 순간까지, 허공에 머무는 그 짧은 시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한순간에 만개했다가 순식간에 지고 마는 벚꽃의 생리처럼 기쁜 우리 젊은 날도 어쩌면 초속 5센티미터로 저물고 있구나, 하고. 제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겼는지 관심도 없이 저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바람과 햇살에 제 몸을 맡긴 채 날아갑니다. 짧기에 애틋하고 저물기에 눈물겨운, 그것이 생명의 아름다움이라며. 꽃들은 그렇게 찬란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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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도의 봄꽃과 조우했으니 봄의 뒤를 쫓아 북상해야겠습니다. 한반도의 산과 강과 도시와 숲을 따라 봄꽃이 피어나는 속도로. 그러다가 나는 어디쯤에선가 멈춰야 하겠죠. 남한의 북쪽 국경, 북한의 남쪽 국경 즈음에서. 새들뿐만 아니라 꽃들도 자유롭게 철조망 넘어 북상하지만 나는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나만 홀로 남겠죠.

봄은 나와 헤어진 뒤에도 계속 북상하며 개성에서, 해주에서, 평양에서, 흥남에서, 청진에서, 마침내 백두산에서도 봄꽃을 피우겠지요. 그러나 나는 한반도의 봄을 뒤쫓다가 꽃길을 반으로 접고 멈춰선 채 한탄강 우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얼음 녹은 강이 밤새 우는 동안, 문득 잠 깨어 나도 따라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봄과의 이별이 아파 울고, 봄의 뒤를 계속 따라가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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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 휴전선 인근에서 봄과 이별한 나는 철원 노동당사로 갔습니다.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란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던 곳. 그들은 이곳에서 노래했답니다. ‘언젠가 작은 나의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의 마음속엔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젊은 우리 힘들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우리가 서로 손을 잡은 것으로 큰 힘인데’라고

반 토막 난 봄길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철원 노동당사 뒷마당에 핀 목련 꽃봉오리를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 아스라한 빛 안에서 꿈틀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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