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도 병이 되고 -별천지마을

그토록 짙었던 안개는 날이 밝으면서 사라졌다. 해가 나자 세상에는 온기가 가득했고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이 아니라,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듯했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는 ‘못골’을 비롯해 ‘지동리’와 ‘별천지마을’까지 세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표지석 옆 다리 이름은 지동교였다. 다리를 건너 마을길을 걷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중년을 넘긴 부부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내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있었고, 남편은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곧 방향을 틀어 누런 들로 들어갔다. 수확이 끝난 밭이 아니라 말라버린 잡초가 무성한 들이었다.

남편은 이내 삼지창으로 땅을 들추기 시작했고 아내는 쪼그리고 앉은 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캐내고 있었다. 마치 따뜻한 봄날, 나물이라도 캐는 분위기였다. 혹시 가을에 돋아나는 나물 종류도 있는 것일까? 하긴, 봄이라고 해도 나물을 그렇게 캐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물보다는 좀 더 깊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언가를 캐내는 것이 분명했다.

무심한 척 그들을 지켜보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곧바로 사과 과수원을 만났다. 대구 사과는 옛말이고 이제 강원도 사과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과수원 건너편에는 마시멜로를 닮은 하얀 곤포들이 수확이 끝난 황토밭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곧 소들의 여물이 될 것들이었다.

길은 곧 Y자 모양으로 갈라졌다. 좌측 길은 시멘트 포장도로였고 우측 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다.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난 풍경은 이 계절에 보기 힘든 초록 대지. 바로 배추밭이었다. 튼튼하게 자란 배추밭 한가운데는 커다란 측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몸통 기둥이 워낙 실해서 마치 넓은 밭을 지키는 수호신 같기도 했다. 길가에 서서 그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색까지는 불가능한 여건이었다.

다시 길을 걸었고 첫 민가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트럭 위에서 배추를 던졌고 아저씨는 아래서 그 배추를 받아 바닥에 쌓았다. 배추를 던질 때마다 아주머니 입에서 흘러나오는 끙~ 끙~ 앓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고 그 소리의 끝맺음과 동시에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배추는 아저씨 손에 척척 달라붙었다.

좀 전에 그린 그림을 어딘가에서 채색을 하고 싶었다. 마침 굵직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언덕을 만났다. 솔숲 가운데는 정자도 있었다. 언덕을 올라가고 보니 사당까지 있는 솔숲이었다. 정자 옆 피크닉 벤치에서 채색을 시작했다. 채색하는 사이에 도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부부가 언덕 아래 차를 세운 후 마을의 지세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기저기 땅을 보러 다니는 것 같았다. 부부는 곧 내가 있는 솔숲까지 올라와 마을의 모양새를 자세히 살피고 내려갔다.

채색을 마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아침부터 산불조심 깃발을 단 차량이 수시로 오가더니, 그중 한 아저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며 나에게 인사까지 남겼다. 그리고 김장을 준비하는 또 한 집을 보았다. 이미 절인 배추는 마당 한쪽에서 물기를 빼고 있었고 고무장갑을 낀 가족들은 분주히 오갔다. 김장 때문에 도시에 사는 자식들까지 시골집을 찾은 듯 보였다.

하루에 세 번 들어오는 버스의 종점을 지났고 다시 한적한 길. 그리고 발견한 안내판 하나. 이곳에서 약 2km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카페 ‘이화에 월백하고’. 포근한 날씨 때문에 이제 살짝 땀까지 났다. 추위를 걱정해 입었던 얇은 패딩 조끼를 벗어서 배낭에 쑤셔 넣었다.

뼈대만 남은 채 헐벗은 비닐하우스를 지나자 살짝 불안해졌다. 이 길이 맞는 것일까. 그때 발견한 또 하나의 안내판.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300m 직진하시오’. 전봇대 아래 세워진 센스 만점의 작은 안내판이었다.

카페는 소박하고 아담했다. 실내가 좁아서 테이블은 하나였고 둘이 앉을 수 있는 사이드 테이블이 또 하나, 그리고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바텐’이 전부였다. 작은 카페는 주인 부부의 손길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특히 목공을 한다는 남자의 솜씨가 돋보였다. 어느 곳 하나 직접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카페는 목금토일만 손님을 받았다. 영업시간도 오후 1시부터 7시까지였다. 주5일 근무가 아니라 주4일 근무라니. 노동시간도 달랑 6시간. 꿈의 직장이었다. 그럼에도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카페에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모두 카페 하나만을 위해서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주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온종일 커피 물을 끓이는 시골 카페를 생각했던 나에게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풍경이었다.

커피는 모두 핸드드립 커피였다. 아직 마셔보지 못한 코스타리카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는 사이 얼렁뚱땅 실내 일부를 스케치했다. 잠시 후, 앞에 놓인 하얀 커피잔. 코스타리카 커피는 신맛과 쌉쌀한 맛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있었다.

커피 향을 타고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도 감미로웠다. 책 하나를 선정해서 음악 사이사이에 좋은 문장들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얼핏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여행 가방에 바퀴를 달 생각을 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고 여행을 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국내든 해외든, 1박 2일이든 6개월이든, 늘 배낭을 고집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여행 스타일과는 무관하게 여행 가방에 바퀴가 달린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덕분에 여행자의 몸은 더 자유로워졌으니까.

커피 한 잔 마시기에는 조금 오래 앉아 있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밖에도 테이블이 있었다. 돌아가겠다는 마음은 어쩌고, 다리 밑에서 양파가 말라 가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스케치를 마치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을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언제쯤 먼 나라로 다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여행을 가지 않으면 병이 들고 마는 사람들은 잘 버티고 있는 것일까. 이조년의 시를 읊어보았다.

梨花(이화)에 月白(월백)하고 銀漢(은한)이 三更(삼경)인데

一枝春心(일지춘심)을 子規(자규)야 알랴마는

多情(다정)도 病(병)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카페의 이름이 된 구절보다 마지막 구절에 마음이 닿았다. 그리움도, 사랑도 결국 병이로구나. 그 깨달음을 700년 전 이조년도 알고 있었구나. 그도 분명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했던 것이 분명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해 병이 들고, 사랑 때문에 또 병이 들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병이 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그래서 별 것 아닌지도……. 이제 곧 겨울이다.

글과 사진 박동식

? [오지마을 드로잉 여행]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마을을 여행하며 몇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지만 간혹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글, 사진 박동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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