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고요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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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고요는 모든 것이 처음 시작되는 곳이자, 모든 것이 창조되는 곳. 고목나무에도 새싹이 돋고 화사한 꽃이 피는 봄, 그래서 나도 새로 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고요를 찾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파랑새처럼.

고요는 현대문명사회에선 아무런 효용이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컴퓨터, 자동차, 스마트폰,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그런 유용한 것들 보다 고요가 더 큰 치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설하는 장자의 말에 가장 잇닿아 있는 것이 고요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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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고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나는 길을 떠났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북부 육백산 골짜기에 무건리라는 마을이 있고, 그곳에 원시의 고요를 간직한 이끼계곡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계곡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다른 생물은 살지 못하고 1급수 냉수성 물고기 독중개만 산다고. 원시의 계곡이 나를 끌어당겼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 조금만 더 가면 이끼계곡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해가 이미 많이 기운 탓에 도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습니다. 도계는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탄광마을입니다. 근데 영화 속 퇴락한 풍경과 달리 예쁜 간판을 매단 작고 아담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니 퇴락해가던 도계에 다시 봄이 오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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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기차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아침 7시 40분. 강릉발 영동선 첫 열차가 도계역에 도착하는 시각. 우선 하고사리역으로 향했습니다. 하고사리역에서 우측으로 난 도로로 진입해야 무건리 이끼계곡으로 가는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까요. 석회암 캐는 작업장, 시멘트 싣는 차량, 무전기를 든 사람들, 군데군데 뚫려 있는 갱도들. 광업소를 지나 마침내 <차량진입금지> 안내판이 가로 막고 있는 작은 무건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차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지요.

낙엽송 그늘 아래 가파른 포장길을 한 시간 정도 오르니 드디어 완만한 황톳길입니다. 성황나무 한 그루 돌무더기를 두른 채 서 있고, 나는 잠시 앉았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고갯길을 걷는 내내 바람소리, 새소리, 숨소리, 발자국 소리만이 텅 빈 길의 침묵을 채웁니다. 한 시간쯤 걷자 산비탈 따라 민가가 나타났습니다. 큰 무건이 마을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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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무건이의 지명은 소달면으로 절터골, 하장골, 서낭골 등지에 70여 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화전민 이주계획에 따라 이사를 가고 현재는 자기소유 농지를 가진 주민만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분교는 1994년 폐교가 되고 이제 5~6채 집들만 남았습니다. 마을 앞을 지나는데 오른쪽 비탈을 향해 ‘이끼계곡 가는 길’ 화살표를 그려놓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누가 써둔 것일까요? 화살표를 따라 솔숲 사이 좁고 가파른 길을 한참 내려가니 세찬 물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펼쳐진 이끼의 나라. 물론 그랜드캐넌처럼 장대하거나 이구아수처럼 거대한 폭포는 아니지만 이끼로 둘러싸인 공간 속으로 들어오자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착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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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이끼, 그리고 터질 듯한 원시 생명력으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언어를 잃고 고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쩌면 옛 선사들이나 성자들이 황무지나 설산, 혹은 토굴에서 마주친 것은 고요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고요와 대면하다가 고요, 그 자체가 되었는지도 모르죠. 쿵쾅 거리던 내 심장 박동이 똑똑 이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맞춰지더니 내 안에 고요가 고입니다. 그리고 고요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인생은 자신이 ‘나왔던 고요’와 ‘돌아갈 고요’ 그렇게 두 개의 고요 사이를 지나가는 한 편의 여행이라고.

봄날의 고요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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