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구글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탑골마을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크기였다. 탑동리 탑골마을. 그 외에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외지인이 마을에서 벌을 쳤었는지 외지인은 양봉을 금지한다는 현수막이 표지석 일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표지석을 지나 길을 걷는 동안 좌측에서는 우렁찬 계곡 물소리가 내내 함께했다. 비가 온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수량이 만만치 않은 계곡이었다. 계곡의 풀들은 지난 수해 때문인지 일제히 하류를 향해서 납작 엎드려 있었다.

10여 분을 걸었을까? 무밭에서는 수확이 한창이었다. 남자들은 무를 뽑았고, 여자들은 뽑아놓은 무의 목을 맨손으로 잘랐다. 뚝뚝 분지른 무청은 붉은 마대자루에 쑤셔 넣었고, 목을 자른 무들은 즉석에서 종이상자에 담아 포장을 했다. 그러고 보니 사방이 온통 무밭이었다.

“이쪽은 무 농사를 많이 하나 봐요?”

마대자루를 옮기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많이 하는데, 여기는 해발이 높다 보니까 1년에 무 한번빽에 안 심잖아요. 1년에 땅을 80일빽에 못 써요. 남쪽은 무 뽑아내고 다른 것도 심고 해도, 여기는 해동이 늦게 되고 겨울이 일찍 오잖아요. 그러니까 두 번 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무밭 곳곳에는 버려진 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뽑지 않은 무들도 있었다. 모두 상처가 있거나 섞은 것들이었지만 간혹 몸은 성한데 모양이 짐승의 발처럼 기괴한 것들도 눈에 띄었다. 선택받지 못한 무들은 마치 전쟁터의 패잔병 같았다. 상품 가치가 없는 무들은 그렇게 가을과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다음 해 퇴비 역할이라도 할지 모를 일이었다.

“퇴비 안 돼요. 퇴비 따로 해야죠. 겨울게 얼었다 풀리면 그냥 없어져요.”

아저씨의 대답은 단호했다. 퇴비조차도 되지 못하는 버려진 무들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길은 계속 낮은 오르막이었다. 조금씩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셈이었다. 무밭을 지나서 첫 번째 농가를 만났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는 옥수수가 말라가고 있었고 보이지도 않는 닭들이 어디선가 울고 있었다. 지붕 위 굴뚝에서는 증기기관차의 수증기처럼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문 대신 세워진 포도나무였다. 포도나무 넝쿨이 만들어 주는 그늘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는 구조.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만 언젠가는 살아보고 싶은 집이었다.

다시 길을 걸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좌측에 있던 계곡이 우측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길가에는 노란 꽃 몇 송이가 피어있었다. 환하게 피어난 꽃은 분명 달맞이꽃이었다. 하나가 지나가고 다시 또 하나가 지나가고. 그렇게 달맞이꽃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놀라운 풍경. 드넓은 밭 모서리에 모여서 수십 송이의 보라색 꽃을 피운 그것. 그건 말로만 듣던 당귀꽃이었다. 당귀꽃이 이토록 강렬할 줄은 미처 몰랐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다 피어난 꽃은 파라솔을 닮아 있었지만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은 꽃봉오리가 다 열리지 않은 채 하나같이 꽃 앞에 초록 잎들을 물고 있었다. 매우 생경한 모양새였다. 당귀는 꽃이 피면 더는 약재로서 가치가 없다. 그러니 이 당귀들은 씨앗을 채종하기 위해 일부러 꽃이 필 때까지 재배한 것이다. 당귀는 가을에 씨를 뿌린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싹이 트고 그것을 다시 옮겨 심는다. 마스크를 벗고 살짝 코를 들이밀었다. 조금 알싸한 향이 느껴졌다.

조금 더 길을 오르자 마을회관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탑골마을을 찾은 이유는 삼층석탑을 보고 싶어서였다. 마을에는 고려시대의 탑이 남아 있다고 했다. 석탑은 마을회관 뒤편, 길에서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마을회관 마당을 지나자 솔밭 앞에 석탑이 서 있었다. 2층 기단의 삼층석탑이었다. 투박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섬세한 모습도 있었다. 특히 위쪽 기단 지붕에는 연꽃 모양을 새겨 넣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하부 기단의 지붕이 일부 깨져 유실된 것이 안타까웠다.

탑골마을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탑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지만 탑과 관련한 전설이나 기록은 전해진 것이 없다. 그저 탑이 있으니 당연히 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석탑 앞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배가 고파졌다.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와 휴게소에서 산 도넛으로 요기를 대신했다.

그림을 그리고 나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탑이 보고 싶어서 왔던 마을이다. 그러니 어쩌면 목적을 달성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 깊은 마을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조금 더 길을 걷자 우측으로 샛길이 있었고 이정표에는 탑동4반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덧 탑골마을 종반 지점에 다다른 셈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먼 길은 아니었다. 마지막 탑동5반까지 걷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이후 길은 급격하게 좁아졌다. 그리고 길은 좌우로 이리저리 굽었다. 그렇게 몇백 미터를 걸었을 때 매우 낡은 농가 하나를 만났다. 예사롭지 않은 농가였다. 마당에는 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은 채 잡초를 제거하고 있었다. 집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직접 지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칠십여덟이여. 강릉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따라서 육이오 전에 일루 왔지. 우리 아버지가 지었는데 육이오 나고 도끼로 지었지. 그때 톱이 있어?”

“보수라도 하셨을 거 아녜요?”

“이게 뭐 보수할 게 있어. 벽이 자꾸 떨어지니까 쎄멘만 조금 발랐지. 귀틀집이라. 호랑이 못 들어오게 한다고 이래 지은 집이여.”

나무를 겹쳐서 지은 집이라 그만큼 튼튼한 집이라고 했다.

“어릴 때 호랑이 보셨어요?”

“내는 못 봤는데 있었겠지. 육이오 전에 진 귀틀집이 평창군에 이거 한 개 빽에 없다 하더라고. 딴 데는 다 헐고 다시 지었는데. 문화재 관리국인가 와서 뭐 하라는데 안 했어. 내가 그걸 어째 하누. 돈이야 뭐 좀 주겠지만 그거 가지고는 꼬라지 안 돼여.”

아마도 사료적 가치 때문에 문화재 관련 부서에서 다녀간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계속 산 것은 아니었다. 군대 제대 후 서울에서 생활했다. 20년 전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이 집과 5천 평 땅은 남에게 붙여 주었다. 할아버지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불과 6~7년 전.

“멀쩡한 사람이 여 뭐하러 와 있겠어여. 호흡기가 나쁘니까 숨이 차서 많이 걷지도 몬해여. 그래도 여 오면 공기가 좋으니까 좀 들해여.”

할아버지는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다고 했다. 지금도 병원에 가야 해서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올라가신다고 했다. 그나마 겨울에는 추워서 있지 못하고 3월에 내려와서 10월이면 다시 서울로 가신다고 했다. 사실 주거 환경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건강을 더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도 서울보다 좋다고 하셨다. 할 일이라곤 밥해 먹는 일뿐이라 힘든 것도 없다고 하셨다.

탑골마을 마지막 집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

“마지막 집 있는 데까지 한 뭐 2키로 봐야져.”

남은 2km를 뚜벅뚜벅 걸었다. 마지막 집을 앞두고는 언덕도 제법 가팔라졌다. 3~4년 전에 새로 지었다는 마지막 집은 생각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언덕이 심해서 이중으로 쌓은 축대 위에 집이 있었다.

하지만 고추밭에서 일하시는 할머니에게 확인해 보니, 그 집은 마지막 집이 아니었다. 그 집 뒤 산길 모퉁이를 돌면 또 하나의 집이 있다고 했다. 주말에만 주인이 내려온다고 했다.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사유지니 올라가지 말라고도 했다. 알았다고 인사는 드렸지만 나는 어느새 산길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탑골마을의 마지막 집은 자작나무 숲에 가려서 창문만 아주 조금 볼 수 있었고 진입로는 철제 펜스로 막혀 있었다. 주변 풍경에 대한 느낌을 음성으로 메모하려고 스마트폰을 눌렀다. 하지만 초기화 중이라는 안내만 반복할 뿐, 음성 메모 기능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기다린 후에는 이런 안내가 떴다. 현재 구글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구글 론처를 쓰고 있었다. 처음 보는 스마트폰 안내 문자였다. 무슨 오류였을까?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곧 구글 사용이 가능한 세상에 다다르겠지만 자꾸만 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속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 [오지마을 드로잉 여행]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마을을 여행하며 몇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지만 간혹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글, 사진 박동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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