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가 끝나고, 나에게로 향하는 길

에스제이진-11월여행을탐하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코끝이 시려오는 11월로 들어섰다. 10월의 마지막 밤, 어떤 이는 최근 아이유가 다시 부르기도 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떠올렸겠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밸런타인데이, 화이트 데이와 더불어 어느새 대중적인 이벤트로 자리 잡은 ‘할로윈데이’를 연인과 함께, 친구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할로윈 데이는 원래 고대 켈트족 축제로 비롯되어 그리스도교 전파와 함께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11월 1일) 전야에 치러지는 행사. 홍대 앞 클럽과 대학가와 호텔이 할로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밤이 지나면 곧 바로 11월의 첫 날이다. 그리고 할로윈데이뿐 아니라 단풍과 물때 만난 해산물과 수확철의 과일로 인해 북적이던 축제도 잦아든다. 온산을 붉고 노랗게 물들이던 잎들이 찬 서리에 후두두둑 떨어지듯이.

 

10월이 축제의 달이라면, 11월은 가수 이용과 아이유가 노래하듯이 이별 후의 시간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사람들은 이 가사에서 헤어진 연인의 심정을 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11월의 가을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겨울로 들어서기 전 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의 노래’ 같다. 태양의 계절에 나무와 가지 끝의 잎사귀가 나누었을 ‘뜻 모를 이야기’와 가을이 오고 제 잎을 스스로 털어낼 수밖에 없는 나무의 ‘쓸쓸한 표정’, 그리고 남는 것은 ‘진실’은 무엇인가? 나 홀로 물어야 하는 시간.

 

에스제이진 가을낙엽

 

부족한 수분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수목들이 잎들을 털어 내고 뿌리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듯, 그동안 햇살 아래서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나누는 힐링의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 오롯이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힐링을 하라고 자연이 말을 건다. 결국 모든 관계의 시작이자 뿌리는 나 자신이므로. 제 뿌리를 찾아가고 싶을 때면 도심의 공원을 산책하며 질문 속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한적한 산사나 성당을 찾아가는 것도 좋다.

 

에스제이진_성당-안-스테인드글라스-조명

 

강원도 횡성에 소재한 풍수원성당은 가톨릭교회지만 실내가 선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전주 전동성당, 아산 공세리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가톨릭 성지로서 한국인 신부가 세운 최초의 성당. 1896년 2대 신부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가 착공, 신자들이 직접 나무를 패고 벽돌을 쌓아 1907년에 준공했다. 풍수원성당은 규모가 크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명동성당을 축소해 놓은 듯 붉은 벽돌로 쌓은 고딕양식 건축물.

 

TV 드라마에도 여러 번 등장했는데 풍수원성당을 처음 알린 <러브레터> PD는 ‘성당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도 아름다운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풍수원성당을 드라마 배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치형으로 개방된 출입구를 지나 문을 열면 마룻바닥이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정면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으로 환하고, 어두운 공간은 12사도를 나타내는 12개 기둥마다에 매달린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밝힌다. 그윽한 빛과 아치로 이루어진 곡선이 잘 어우러진 성당이 아늑하다. 미사가 없는 날이면 성당은 텅 빈다. 홀로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노라면 고요한 선방에 앉아있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에스제이진_마루가-깔린-풍수원-성당

 

나는 가톨릭 성지를 찾기도 하지만 종종 산사를 찾곤 한다.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엔 수구암처럼 좋은 곳도 드물다. 수구암은 경기도 파주 고령산 아래 천년고찰 보광사에 딸린 암자로, <비밀의 문>에서 한석규가 연기하고 있는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 씨를 모신 소령원의 원찰로 삼았던 절이다. 영조가 중수했다는 대웅보전과 만세루. 툇마루에 앉아 절 마당에 내려앉은 가을 햇살을 바라보는 시간. 내 안에 고요가 그윽하게 쌓이면 사찰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수구암으로 올라간다.

 

에스제이진-산사로-가는-길

 

어느 해 가을 이 길에서 만난 노승은 떨어지는 잎을 보며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란다. 그래서 명상하기 좋은 계절이고, 명상이란 절대고독의 시간이지‘라고 했다. 그때 수구암에는 백담사에서 오셨다는 한 스님도 묵고 계셨는데, 보름달이 뜬 가을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노래 한 곡을 불러주셨다. 한번 듣고는 우리 가요 중 이렇게 뛰어난 가사가 있었던가, 하고 감탄했던 노래. 나중에 여쭤보니 철가방 프로젝트의 <풍경>이란 노래로, 가사는 이외수가 쓰고, 이남이가 노래로 만들었다고 한다.

 

11-4

 

가을밤 산사 대웅전 위에 보름달 떠오른다.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도 풍경소리 맑아라.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낙엽도 흩날리고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부처도 흩날린다.
삼라만상이 절로 아름답거늘
다시 무슨 깨우침에 고개를 돌리랴
밤이면 처마 밑에 숨어서
큰 스님의 법문을 도둑질하던
저 물고기는 저 물고기는
보름달 속에 들어앉아 적멸을 보고 있다

 

그때 수구암에는 풍경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보광사 찻집에 딸린 가게에서 풍경을 하나 사서 부목처사와 함께 수구암 처마 밑에 풍경을 달았다. 법문을 도둑질할 물고기도 생긴 셈이다. 올해 볼 수 있는 보름달은 이제 두 번이 남았고, 11월은 7일에 보름달이 뜬다. 내가 매단 그 물고기는 이제 적멸을 보고 있으려나?

여행을탐하다 11월호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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