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탐하다 – 태국 빠이에서 보낸 12월

에스제이진-12월

 

첫 눈이 내릴 것이다. 세상은 온통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부풀어 오르겠지. 강아지들 차가운 발바닥에 깜짝 놀라 눈밭을 달리고, 아이들은 작년보다 더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며 행복한 비명을 지를 테지. 그러나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내려와 상공에 머물면서 영하의 날들이 계속될 것이다. 마스크 쓴 채 콜록콜록 기침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속을 지나다가 문득 문득 당신은 따뜻한 남쪽으로 튀고 싶어질 것이다.

아는 나라 이름을 1분 안에 말해보라고 한다면, 당신은 몇 개의 나라를 댈 수 있을까?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등. 아마도 당신이 떠올린 나라들의 대부분은 우리와 비슷한 위도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떠올리는 12월의 지구는 온통 겨울이다. 그러나 호주처럼 한국과 정반대의 계절이 지나가는 나라도 있고, 건기와 우기로 나뉜 나라도 있다. 이 별의 12월은 인류의 피부색만큼이나 다양하다. 지금쯤 브라질의 해변에선 사람들이 햇볕을 쬐며 비치발리볼을 하고 있겠지.

따뜻한 날씨가 그립다고 해서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해변으로 당장 여행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데이터를 주고받듯 초고속으로 내 몸과 짐을 한 번에 업로드하고 다운로드 받는 이동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으니까. 비행기를 타고 오고가는 데만 4~6일이 소요되는 곳으로 휴가를 떠날 엄두를 내는 건 힘들다. 그럼 대안은? 아시아권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일본의 오키나와, 대만,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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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름에 다녀온 동남아의 해변휴양지들이 식상한 사람들에겐 태국의 빠이(Pai)를 추천하고 싶다. 태국하면 방콕, 파타야, 푸켓만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빠이는 낯 선 지명일 것이다. 그러나 빠이는 태국인들 스스로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꼽는 곳이고, 근래 태국을 찾는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핫한 여행지기도 하다. 한국에서 치앙마이까지 가는 직항이 있어서 빠이까지 가는 길이 어렵진 않다. 당신은 이곳에서 지금껏 경험한 12월과 전혀 다른 12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잠깐,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해외여행인데, 굳이 동남아의 산골마을엔 왜 가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빠이는 여느 산골마을이 아니다. 인구 3천명의 원주민과 장기체류 여행자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빠이에 도착한 날 저녁, 당신은 마을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보행자거리(워킹스트리트)를 거닐며 거대한 팬시점이나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기분이 들 것이다. 대도시에서의 번잡한 삶과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피해 빠이로 온 예술가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마을 이름(Pai)을 브랜드화해서 만든 아기자기한 예술작품과 아이디어 상품들은 제각각 독창적이고, 여느 공산품에선 느껴본 적 없는 감동을 준다.

 

에스제이진-오토바이가-제-가게로-트랜스포머

 

하루만 지내봐도 알게 되겠지만, 빠이의 날씨는 다채롭다. 아침은 4월의 봄날 같고, 한낮은 6월의 초여름 날씨 같다. 여행자들은 여름옷을 입고 빠이 근교의 명소들을 쏘다닌다. 노천 온천과 빠이 캐년, 차이나타운과 운래 뷰포인트, 크고 작은 폭포와 빠이를 둘러싼 산을 오르내리는 트렉킹. 낮엔 보행자 거리에 차들이 오간다. 차량이 오가도 될 정도로 한가한 시간이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보행자거리에 ‘워킹스트리트 마켓’이 선다. 어디선가 나타난 알록달록 예쁘게 칠한 미니버스와 오토바이, 자전거들이 길을 따라 늘어선다. 각자가 타고 온 탈 것들이 상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된다. 이제 여행자들이 낮 동안 햇볕에 잘 그을린 몸을 외투로 감싸고 몰려드는 시간이다. 빠이의 저녁은 초가을처럼 기분 좋게 선선하다.

빠이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건 ‘느린 삶’과 ‘자연’이다. 당신은 빠이에서 이런 문장을 보게 될 것이다. PAI CAN FIX BROKEN HEART. 직역하면 ‘빠이는 부서진 심장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의역하면 ‘빠이는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여느 동남아 관광지에선 쉽게 볼 수 있지만 빠이에선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거나 술병을 들고 오가는 관광객들과 어린 현지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백인 노인들. 그래서 빠이는 가족 여행객들이 유난히 많다.

 

에스제이진-여행을탐하다12월-온가족이-다함께-여행다니기

 

빠이의 길거리 음식들은 맛있을 뿐 아니라, 양념통 같은 사소한 것들마저 참 예쁘다. 이 마을 사람들의 감수성은 타고난 것일까? 마을 규모도, 시장 규모도 작아서 둘러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그러나 막상 가게에 들어서면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 1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일쑤다. 쇼핑에 취미가 없는 사람도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이상해지는 곳. 그렇게 몇 개 가게를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시장이 파할 시간이 다가온다.

워킹 스트리트 마켓은 저녁 9시 반 즈음 문을 닫는다. 시장이 문을 연지 3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상인들은 슬금슬금 차려놓은 물건들을 챙긴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 일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여긴다. 필요한 만큼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사용한다. 거리가 조용해지면 여행자들은 빠이 강 건너 시내 외곽 술집으로 가거나, 마실 거리와 가게에서 산 음식들을 싸들고 방갈로와 마당이 있는 숙소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아까운 여행자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서로의 여행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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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12월의 빠이는 혼자 갈만한 여행지는 아니다. 위험해서가 아니라, 연말 연초의 빠이는 줄곧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의 무드 속에 젖어 있기에 싱글을 더욱 외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해 빠이의 연말 분위기가 떠오른다.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밤하늘 위로 올라가던 수천 개의 풍등들. 빠이의 밤하늘 전체가 은하수로 뒤덮인 듯 했던 밤. 그이와 나도 하나의 풍등을 띄워 보냈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 화르륵 타오르며 풍등은 풍선처럼 부풀고, 지상의 중력을 뿌리치고 풍등이 슬금슬금 위로 떠오를 때, 그이와 동시에 손을 놓던 순간…….

당신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그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가?

12월 여행을 탐하다. 여행작가 노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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