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진부면 상두일 마을

제주에 상륙한 태풍이 북상 중이라는 뉴스는 아랑곳없이 하늘은 맑기만 했다. 차량 통행이 잦지 않은 듯, 중앙분리대 틈새에 잡초가 무성한 길을 지났다. 그리고 만난 고개 하나. 중앙분리대는 고사하고 차선도 없는 비좁은 길이었다. 포장도로임에도 맞은편에서 차량이 오면 한쪽으로 비켜줘야만 할 것 같은 길.

고개를 넘어서자 아주 잠깐 자작나무가 몇 그루가 서 있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은 T자 모양의 삼거리였다. 좌회전은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이었고 우회전은 나지막한 내리막이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결정해야 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한참 동안 정면을 바라봤다.

황무지 같은 황토밭 건너에 쓰러질 듯 위태롭게 버티고 선 낡은 농가. 차를 세우고 황토밭 사이를 걸었다. 황무지처럼만 보였던 드넓은 밭에는 가을배추가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하트를 닮은 초록 싹들은 두 개씩 등을 맞대고 거친 땅을 비집고 올라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빈집인 줄 알았던 농가는 사유재산이라는 접근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빨간 우유 상자와 흙벽에 걸린 밀짚모자. 그리고 몇 가지의 농기구. 집은 조금만 밀어도 쓰러질 것처럼 허술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잘 버티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우체통 위에, 등기우편물은 아래의 번호로 전화를 달라며 010으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놓았다. 한때는 농가였겠지만 지금은 농막 정도의 역할만 하는 것이 분명했다.

농가 앞에는 한 무리의 옥수수와 몇 그루의 능금나무가 서 있었다. 옥수수는 다 자란 상태였고 빨갛게 익어가는 능금은 갓난아이의 주먹보다도 작았다. 자신들의 간식 정도를 수확하기 위해 심은 것들로 보였다.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뒤로 하고 황토밭 길을 되돌아 나왔다. 돌아온 삼거리에서 내가 선택한 길은 내리막이었다. 그리고 이내 만난 초록이 무성한 밭.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집과 학교의 거리는 대략 버스로 일곱 정거장 정도의 거리였다. 서울이었음에도 변두리였기에 곧바로 이어지는 버스 노선이 없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면 아마 환승 없는 버스 노선이 있었다고 해도 버스를 타고 등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에게도 걷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지만, 그때는 다들 가난했으니까.

등하교 때 지나는 길에는 커다란 밭들이 여러 개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밭이 있었다. 바로 당근밭이었다. 어린 나에게 당근밭은 밭이 아니라 초록 대지였다. 진짜 잔디보다 더 아늑해 보였던 초록 대지. 그토록 예쁜 밭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제주에서 다시 당근밭을 만났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당근밭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오늘 내 인생의 세 번째 당근밭을 만났다. 갑자기 궁금증 하나가 생겼다. 마트에 가면 당근은 배추나 무만큼이나 흔한 채소다. 그런데 그 많은 당근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토록 흔한 배추밭과 무밭은 당연히 이해하겠는데, 도대체 마트에 쌓여 있는 당근들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근밭을 지나 내리막을 모두 내려갔을 때 의외의 장소 하나를 만났다. ‘평창 라벤다 팜’. 제법 유명할 것 같은데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오지’를 찾아왔는데, 갑자기 관광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언덕 위의 농장으로 올라갔다. 이제 막 철이 지난 라벤더들은 보랏빛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꽃이 지고 푸른 잎들만 남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라벤더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고랑을 사이에 두고 리아트리스, 쑥부쟁이, 분홍바늘꽃, 맨드라미 등도 피어 있었다.

라벤더 사이를 지나 그늘 벤치에 앉았다. 여행자는커녕 주인도 보이지 않는 철 지난 라벤더 농장. 인기척 하나 없는 농장에 앉아 있자니 라벤더밭 전체가 내 것 같았다. 라벤더밭에는 라벤더만큼이나 많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하얀 나비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벌이 아니라 나비들이 꽃가루를 옮기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때 언덕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농장 한복판에 서 있는 풍차는 그저 장식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불자 풍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나뭇잎들의 몸을 뒤집으며 산 위로 몰려갔다. 소리 없는 바람이 흔적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바람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늦여름의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태풍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농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박정동씨를 만났다. 문이 잠긴 마을노인회관 앞이었다. 빨간 나무 우체통이 세워져 있던 노인회관.

그는 마흔 중반의 젊은(?) 농부였다. 아버지의 고향이 이곳 두일리고 자신 역시 같은 진부면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서 약초도 썰고 배달도 다녔다. 당시 아버지는 당귀를 재배하며 영농조합을 이끌고 있었다.

“쩌어~기 고개 넘어가면 바로 나오는데, 찻길로 가면 한~참 돌아가죠.”
그는 뒷산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어릴 때 형 누나 손을 잡고 몇 번인가 산을 넘어 면사무소가 있는 진부를 오간 이야기였다. 지금은 누구도 그 길을 걷지 않는다. 2006년 마을에 큰 수해가 났고, 이를 복구하면서 있던 길은 포장을 했고 없던 길도 새로 닦았다. 이후 진부에 있던 공장도 이곳으로 옮겼다.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평창 당귀가 국내 당귀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정선이나 봉화, 영월 등 태백산맥을 따라 몇몇 곳에서 당귀를 재배하고 있지만 양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당귀는 3년 정도 키우면 꽃이 피구 씨앗이 달려요~오. 떠날 때가 된 거죠. 씨앗 달려버리면 약재로는 못 써요. 그래서 2년 차가 되면 수확을 해요.”

잠시 혼란스러웠다. 마지막 순간에 피우는 것이 꽃이고, 꽃이 핀 자리에 씨앗이 맺힌다는 사실. 당귀마저도 떠나기 전에는 마지막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구나. 그렇게 또 다음을 위해 씨앗을 맺는 거구나.
엄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 엉뚱한 질문을 했다.

“도시 생활이 부럽지는 않아요?”
“글쎄요. 재미가 없어 보여요~오. 서울에만 있는 게 이젠 없는 거 같아요. 택배만 주문해도 대문 앞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인데~에. 집사람 친구가 가끔 서울에서 놀러를 와요. 뭐, 영어학원 보내는데 100만 원 쓴다 그러는데, 우리는 공분 억지로 시키지 말자 그러거든요. 공부만 살길이 아니란 거죠.”

자식 공부 욕심이 많은 아버지 덕분에 그는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 그 역시 서울에 친구들도 많다. 하지만 도시의 삶이란 것이 별거 없어 보인다고 했다. 자기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올봄 세상을 떠났다. 당귀처럼 그의 아버지도 그에게 남겨준 것이 있다. 농사와 빚. 그는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농사만 남겨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평창 최고의 당귀 농사꾼이었으니까. 적어도 당귀 농사에서는 평창에서 최고라면 대한민국 최고나 다름없으니까.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 바람이 조금 더 거세졌다. 아직 하늘은 맑았지만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빗방울은 나의 머리 위뿐만 아니라 당귀의 꽃 위에도 떨어지겠지. 서둘러 도시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때가 되면 도대체 어떤 꽃을 피우고 떠나야 할까.

? [오지마을 드로잉 여행]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마을을 여행하며 몇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지만 간혹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글, 사진 박동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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