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여행을탐하다6월호

   6월, 당신이 문득 떠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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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힘껏 발돋움하는, 6월. 아직 피서철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해방을 꿈꾸는 전사가 됩니다. 더위로부터 해방, 학업으로부터 해방, 업무로부터 해방…그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혁명처럼 설레는 일이고, 설령 답답한 문제가 없었더라도 앞이 탁 트인 바다를 마냥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여름이 보일락 말락 하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달려드는 6월엔 그런 마음이 더욱 솟아오르죠, 문득! 그래서 나는 바다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모항 가는 길>이란 시에서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하고 묻고선 모항으로 갑니다. 그는 말하지요. ‘모항을 아는 것은/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라고. 시인들은 그렇게 제각각 문득 떠나고 싶을 때 홀로 찾는 장소들이 있나 봅니다. 곽재구 시인은 순천과 여수 사이의 작고 아름다운 어느 섬을 숨겨둔 곶감처럼 빼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알게 되었지만 차마 이 자리에서 밝힐 순 없습니다. 알려지고 나면 더 이상 그 섬은 시장에 내놓은 곶감처럼 되어버릴 테니까요. 대신, 나의 곶감을 알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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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가진 해수욕장. 해운대의 1/7 크기에 불과한, 작고 아늑한 해변에서 광활한 동해를 바라보는 느낌이 어떤지 아세요? 가진 해수욕장은 7번 국도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가진리에 자리 잡은 꼬마해변입니다. 강원도를  벗어나면 ‘그런 해변이 있어?’라고 의아해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낯선 해변이지요. 7번 국도를 달리다가 가진 교차로를 만나면 가진리 방면 해안도로로 들어섭니다. 그러면 곧 좁은 골목이 나오죠. 어촌의 낮은 가옥들 사이로 난 골목을 헤집고 나가면 갑자기 시야가 뻥 뚫리며 눈앞에 옥빛 바다가 펼쳐질 것입니다. 모래사장으로 내려서기 전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냄새를 흠뻑 들이키세요, 바다 비린내가 허파꽈리 하나하나에 베일 때까지. 

해안선 오른쪽 끝엔 갯바위가 있고 그 갯바위에 둘러싸인 바다는 마치 청옥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주 특별해 보입니다. 해안선은 하트모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 날개를 활짝 핀 새처럼도 보이기도 하지요. 지중해나 안다만 해의 에메랄드빛을 쏙 빼닮은 거진 앞바다.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쓸려가는 사이. 심해의 고요가 함께 당신의 가슴으로 밀려왔다가 쓸려갑니다.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 길이 끝나는 곳엔 <쉼>이라는 이름의 작은 펜션이 있습니다. 나는 펜션 여주인으로부터 자신이 연고도 없는 가진리에 들어와 살게 된 사연과 이탈리아인 남편과의 러브 스토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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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녀는 늘 같은 꿈을 꾸곤 했습니다.  큰 바위가 많은 해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꿈은 잦아들었고, 꿈속의 마을도 잊었습니다. 이국을 떠돌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연히 만난 가진리. 그녀는 무작정 이곳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착한 지 오래지 않아 가진리에서 태어난 마을 아주머니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게 되지요. 옛날엔 해변에 큰 바위가 엄청 많았는데 군부대가  다이너마이트로 부수는 바람에 지금과 같은 모양의 해변이 되었다고. 그 순간 잃어버린 꿈이 다시 떠올랐고, 그제서야 이곳이 꿈속의 마을과 꼭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말했지요.  

그녀의 남편 살바토레씨는 고국인 이탈리아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살게 된 건 순전히 아내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관한 확고한 지론을 갖고 있었지요. <아내가 있는 그 자리가 곧 천국>이라고. 그는 아무리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더라도 아내가 없다면 결코 천국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한 가지 조건을 걸었지요. 좋은 아내! 그는 나쁜 아내라면 아무리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지옥이며, 자신은 지금 천국에서 지내고 있다며 자랑했습니다. 살바로레씨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낯설고 조용한 마을에서 외로울 법도 한데, 가진리 앞바다가 마냥 좋고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기에 전혀 불편이나 불만도 없이 지낸다고 했지요. 부창부수라고 자랑하는 건 부인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협상의 달인이라며 남편이 한번만 북한의 김정일을 만났더라면 이미 통일이 되어있을 거라고 했지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하고, 서로의 장점을 칭찬하며, 서로를 아끼는 모습은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는 시간 보다 유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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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가진리에는 민박도 몇 채 밖에 없고, 가게도 몇 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물회를 내놓는 이성업 부부횟집이 있지요. 모래사장 위 야외 테이블에 앉아 물회를 주문하면 바닷가답게 신선하고 넉넉할 뿐만 아니라 밑반찬도 백반정식처럼 푸짐하답니다. 맛이야, 내가 먹어본 중 최고였다니까요!   

자, 이렇게 ‘문득 떠나고 싶을 때’를 위한 나의 곶감을 내놓았습니다. 나의 곶감을 먹는 것은 이제 당신 차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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